글/청언(淸言ㆍ明慧網 작가)
[SOH] 진중(陳仲)은 이름이 정(定)이고 산동(山東) 추평(鄒平) 사람으로 전국시대에 유명한 현사(賢士)다. 그의 형은 제나라 경대부(卿大夫 역주-예전의 관직명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장관급에 해당)로서 봉록이 만종(萬鍾)이 넘었지만 그 속에는 또 의롭지 못한 재물도 있었다. 진중은 이를 수치로 여기고 어릉(於陵)으로 이사가서 거주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어릉 중자(仲子)’라고 불렀다.
진중 부부는 신발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비록 곤궁했지만 그 속에 즐거움이 있었으며 남의 재물을 원칙 없이 받으려고 하지 않았고 또한 음식물도 의롭지 않은 것이면 먹지 않았다. 어느 해에 기근이 들어 집에 삼일동안 먹을 양식이 없어 진중은 나무 벌레를 먹으면서 연명해야 했다.
초나라 왕이 진중이 현명하고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사자를 파견하여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서 그를 재상으로 모셔오도록 했다. 진중은 아내와 의논했다. “초나라 임금께서 나를 재상으로 봉하려고 하는데 내가 만약 오늘 재상이 된다면 내일부터 높은 마차를 타고 풍성한 음식물을 먹을 수 있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현재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면서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높은 마차를 타더라도 앉는 곳은 두 발을 용납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풍성한 음식물 앞에 있더라도 고기 한 그릇이면 배가 부릅니다. 지금 만약 그 두 발을 용납할 곳과 그 한 그릇의 고기를 위해 초왕을 도와준다면 지금은 난세인지라 생명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사자에게 감사를 드린 후 백두산 일대에 은거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진중은 자신을 아주 엄격히 요구했고 자신을 억제하면서 몸을 닦았다. 어느 해 큰 가뭄이 들어 물이 없었다. 진중은 아침 일찍 물동이를 이고 10리 밖에 가서 물을 길어야했다. 물이 본래 많지 않았는데 진중이 물을 길은 후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 이때 진중 뒤에 달려온 사람들은 물이 없는 것을 보고 한숨을 지었으며 늦게 온 것을 후회했다. 진중은 이 모습을 보고 아주 후회하는 한편 ‘자신이 왜 남들보다 일찍 와서 물을 길었을까’고 질책했다. 또 한편 자신의 물을 전부 나눠주었다. 물을 나눠준 후 진중은 자신의 물동이를 깨버렸다. 그리고 집에 돌아간 후 며칠 동안 물을 먹지 않았으며 이로써 이익 앞에서 앞을 다투는 자신의 사심(私心)을 제거하도록 경계했다.
한 번은 진중이 꿈속에서 같은 마을 사람의 야채를 몰래 뽑아서 볶아 먹었다. 꿈에서 깨어난 후 그는 아주 후회했는데 필경 자신의 사상 깊은 곳에 그런 좋지 못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음이 몹시 편하지 않았으며 또 그 집에 찾아가 돈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은 또 돈이 없어 그는 자신이 만든 신발을 그 사람에게 주려 했다. 같은 마을 사람이 이 일의 내막을 안 후 단호하게 받지 않았다. 여러 차례 옥신각신하다가 진중은 신발을 내려놓고 가버렸다. 이 신은 그 곳에서 여러 해 동안 놓여 있었고 누구도 그 신발을 가져가지 않았다고 한다. 현지 사람들은 이 예를 들어 자기 자식들을 교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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