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누란(樓蘭)은 중국 고대 서부의 한 소국으로 서역(西域) 36국 중 하나였습니다. 누란은 서남으로는 차말(且末), 정절(精絶), 우전(于闐)과 통했고, 북으로는 거사(車師), 서북으로는 언기(焉耆)와 통했으며, 동으로는 백룡퇴(白龍堆) 사막과 마주해 돈황(敦煌)과 통한 실크로드의 요충지였습니다.
누란이란 명칭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사기(史記)’에 나온 것으로, ‘선선국(鄯善国), 본명은 누란이며 왕이 니성(泥城)을 다스렸고 거리는 양관(陽關)에서 1,600리, 장안(長安)에서 6,100리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사기’에 따르면, 누란인은 기원전 3세기경 국가를 건립했으나, 월지(月氏)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기원전 177년에서 176년 사이 흉노(匈奴)가 월지와 싸워 이기자, 누란은 다시 흉노의 지배를 받게 됐습니다. 누란은 서한(西漢) 시기 14,000여명의 백성과 사병 3,000여명이 있었습니다.
한조(漢朝)이후 중원(中原) 사람들은 이런 신비한 고국(古國)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탐험가 장건(張騫)이 외교사절로 서역에 파견된 후 맨 처음 누란을 중원에 소개했습니다. 실크로드가 개통되자 누란고성은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길목이 됐고 상업의 번성으로 누란국은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됐습니다.
중원의 상품과 문화 역시 실크로드를 따라 누란에 들어와 발달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누란에 전해졌습니다. 누란은 이 시기 이미 서역의 낙원이었고, 사막 안의 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원에서는 전란(戰亂)이 멈추지 않았고, 누란 역시 점점 중원과 관계를 잃어갔습니다. 서기 400년 고승 법현(法顯)은 인도로 경(經)을 구하러 떠났을 당시 이 지역을 지나갈 때, 이미 이곳에는 인적이 없어졌으며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적었습니다.
누란성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 가장 많이 알려진 것으로는 실크로드의 변천입니다. 양진(兩晉)이후 실크로드가 변경됐고, 중원은 누란에 주둔해 있던 군대와 둔전(황무지 개간)사업 역시 북으로 이전됐으며, 이에 따라 누란고성은 점점 쇠락해져 결국 종적을 감췄습니다.
일부는 누란이 여러 국가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점령자들이 성 주민들을 모두 죽인 후 철수했고, 이로 인해 누란은 차츰차츰 모래바람에 매몰됐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른 이들은 기후 변화를 원인으로 꼽는데, 이들은 다시 가뭄과 홍수로 나뉩니다.
가뭄 지지자들은 누란이 실크로드의 필수 경유지이고 자주 전쟁에 노출돼 수리시설과 식물이 심각하게 파괴됐기 때문에 서기 3세기 후 이곳으로 흘러드는 강바닥에 모래가 쌓여 수자원이 부족해졌고, 결국 전염병이 돌자 누란고성의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상반된 주장은 누란고성이 홍수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1,600년 전 누란국 주변에는 큰 면적의 삼림과 각종 다양한 식물이 있었으며 날짐승과 맹수가 출몰하는 등, 생태환경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또 어느 한 시기 누란성 내 호수가 상승해 넘친 물이 누란성을 덮었고, 동시에 누란성 및 주변 지각이 침하해 주변 강물이 누란성을 덮쳤다는 것입니다.
어떤 원인이든 누란고성은 사막의 폐허가 됐으며 누란의 찬란한 문화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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